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F. 케네디 (문단 편집) === 피살 === 주방 복도에서 마주치는 지지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던 로버트 케네디는 당시 16세 소년 후안 로메로와 악수를 하는 순간, 미리 접근하고 있던 시르한에게서 8발[* 데이비드 사우스웰의 책에 의하면, 그 대부분의 총격은 '''뒤에서''' 날아온 것이었다.]의 총격을 받고 3발을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Rfk_assassination.jpg]] 피격 직후의 모습. 오른쪽은 피격당하는 순간 악수를 나눈 16세 소년 후안 로메로 (당시 호텔 주방 보조원). 로버트 케네디는 3발을 맞았는데 머리에 맞은 한 발로 치명상을 입었고 근처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 조치를 받았지만 다음날 새벽 1시경 사망하였다.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은 [[요르단]]계 이민자로서 평소에 로버트 케네디의 친[[이스라엘]]적인 행동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. 원래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나중에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형제가 폐지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.[* 같은 이유로 캘리포니아 주에서 범행을 저지른 희대의 살인마 [[찰스 맨슨]]도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.] 여담으로 이때 시르한을 기소한 검사는 [[제2차 세계대전]] 이후 로스쿨을 나와 법조계에서 활동했던 [[밴드 오브 브라더스]]의 실제 인물 [[린 캄프튼]]. 2016년에도 계속 복역 중이며, 2016년 초에 감형을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.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 당함에 따라서 몇 해 전 존 F. 케네디, 그리고 불과 두 달 전인 1968년 4월 [[마틴 루터 킹]] 목사를 잃었던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. 특히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기에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결국 암살당하면서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. 케네디 형제의 암살은 미국 정치지형상 진보(민주당)와 보수(공화당)의 균형에도 오랜 영향을 끼치게 되어 70~80년대까지 여진이 지속되었다는 평가도 많다. 만일 로버트 케네디가 68년 선거에서 승리해 취임했다면 형과 같은 만 43세가 되는데, 로버트가 생일이 더 늦기에 43세 2개월로 형의 기록을 반년 경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. 물론 선거를 거치지 않은 승계 최연소인 [[시어도어 루스벨트]]를 이길 수는 없었겠지만. 장수한 동생 [[에드워드 케네디]](테드 케네디, [[1932년|1932]] ~ [[2009년|2009]]) [[상원의원]] 역시 다음 선거인 [[1972년]] 선거에서 대통령의 꿈을 꾸고[* 여기는 당선됐다면 취임시 만 40세 9개월. 더 어리다!], 실제로 당선 가능성도 높게 여겨졌지만 여비서의 의문사 일명 차파퀴딕 스캔들로 인해 대통령 경선에서 낙마하고 말았다. 그렇게 닉슨은 (곧 사임하지만) 짧게나마 수명 연장을 했다. 이후 [[1980년]] 선거에서 [[지미 카터]]를 대신할 인물로 부상하지만 경선에서 패배했다. 에드워드 케네디는 [[1994년]] 선거에서 [[밋 롬니]]를 이기는 등 피선거권이 주어지는 30세([[1962년]])에 보궐선거로 당선된 이래 반세기에 가까운 46년 292일을 8선 상원의원으로 지냈다. [[뇌종양]] 투병 속에서도 [[버락 오바마]]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으며, 결국 약 1년 뒤에 병으로 사망했다. 이후 민주당은 전당 대회에서 부통령 [[허버트 험프리]]를 대선후보로 내세우지만 [[리처드 닉슨]]에게 패배했다. 거기에 민주당의 분열 크리까지 겹치면서 선거인단을 제외하고는 간발의 차로 패한 것. 아마 로버트 케네디였다면 당선되었을 확률도 컸을 것이다. 그랬다면 1968년([[68혁명]] 항목 참조)은 완벽하게 실패하지만은 않은 해가 되었을 것이며, 존 F. 케네디 - 린든 B. 존슨으로 이어진 민주당 주도 정국은 당분간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. 또 [[워터게이트 사건]]와 같은 불명예스런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.[* 특히 당시 미국 정부의 신뢰 실추를 계기로, 미국 강경 보수 시대의 서막을 연 [[로널드 레이건]]이 본격적으로 정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의미심장하다.] 여러 의미로, 로버트 케네디의 죽음은, 특히 미국 진보 진영에게 비극적인 사건이었다. 이후 [[2001년]] [[11월]] [[조지 W. 부시]] 대통령은 로버트 케네디의 탄생 76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[[미국 법무부]] 청사의 이름을 '''로버트 F. 케네디 빌딩'''으로 바꾸었다. 한편 후안 로메로가 이 사건에 대해 회고를 했는데 로버트 F. 케네디가 자신이 총탄을 맞은 와중에도 다들 무사하냐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자신도 [[PTSD]]와 '그때 내가 악수를 하지 않았다면...'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회고했다. 백인이었지만 [[미국 흑인 민권 운동]]에 묵묵히, 하지만 꾸준히 참여하여 흑인 사회에서 인기가 매우 좋았다. 그가 암살당했을 때는 [[마틴 루터 킹]]을 잃은 후 얼마 안 되었던 때라 흑인 사회에선 '우리에게 조금 더 좋은 쪽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다 죽는다.'는 절망에 빠져들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